대한민국이 최저임금제를 처음 도입했던 1980년대와 1990년대는 경제성장과 노동문제가 동시에 부각되던 전환기였다. 당시 정부와 사회는 산업화의 급격한 진전에 따른 저임금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법적으로 임금 하한선을 규정하는 정책을 도입했다. 많은 사람들은 지금의 최저임금이 매년 오르는 것에만 관심을 갖지만, 사실 그 뿌리는 1980년대의 경제 현실과 사회적 요구를 반영한다. 그 시기에는 농업국가에서 산업국가로 변모하는 과정에서 값싼 노동력 착취가 심각한 문제가 되었다. 산업단지 곳곳에서 근로자들은 장시간 노동에도 불구하고 생계유지가 어려운 수준의 급여를 받았고, 특히 여성·청소년 노동자들이 임금착취의 사각지대에 놓였다.
정부는 이런 문제를 방치하면 사회적 불만이 폭발하고 경제성장에 지속가능성이 없다고 판단했다. 국제적으로는 ILO 협약을 준수해야 하는 압박도 있었고, 국내에서는 노동운동이 점차 조직화되면서 임금보장의 필요성이 대두되었다.
1986년에 최저임금법이 제정되고, 1988년부터 본격적으로 시행되면서 대한민국은 법적으로 모든 사업장이 지켜야 하는 ‘임금의 최저선’을 마련했다. 그러나 최저임금이 도입된다고 해서 당장 생활이 나아진 것은 아니었다. 초기에는 최저임금액 자체가 매우 낮았고, 적용범위도 제한적이었다. 정부는 산업구조와 경제상황을 고려해 점진적 인상을 추진했지만, 현장에서는 법을 무시하는 사업주도 많았다. 이런 배경을 이해해야 1980~90년대의 변동 추이를 입체적으로 해석할 수 있다.
1980년대 후반: 최저임금제의 도입과 초기 시행
대한민국이 최저임금제를 법으로 명문화한 것은 1986년이지만, 실제 시행은 1988년부터였다. 정부는 최저임금액을 결정할 때 기업의 지불능력과 경제 여건을 최우선으로 고려했다. 당시 첫해인 1988년 최저임금은 시간당 462원이었고, 월급으로 환산하면 약 12만6천원 수준이었다. 이런 수치는 지금 기준으로는 상상하기 어려울 정도로 낮았지만, 당시 물가와 임금 수준을 감안해도 저임금 근로자에게 큰 변화는 주지 못했다.
정부는 노동계와 사용자 단체의 격렬한 의견 충돌을 조율하는 형태로 최저임금위원회를 운영했다. 그러나 실질적으로는 사용자 측 입김이 강했고, 저임금 문제의 구조적 해결보다는 갈등을 완화하려는 수준에 머물렀다. 실제로 많은 사업장은 최저임금을 무시하거나 편법으로 지급했다. 노동감독이 허술했던 탓에 최저임금이 법적으로는 존재하지만 현실에서는 유명무실한 경우가 많았다. 이 시기의 최저임금 인상률은 연간 10%대에 불과하거나 그 이하인 경우도 있었고, 급속한 물가상승률을 따라잡지 못해 실질 구매력은 크게 향상되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저임금제의 도입은 중요한 출발점이었다. 국가가 최소한의 임금을 보장하겠다는 법적 선언이었고, 노동권 보호를 제도화했다는 상징성이 컸다. 당장 저임금 문제를 해결하지는 못했지만, 이후의 임금교섭과 노동운동의 기반이 되었다. 당시의 역사를 살펴보면, 정부는 저소득층의 생계보장을 ‘비용’으로만 보지 않고 사회통합을 위한 '투자'로 전환하는 계기를 만들었다.
1990년대 초중반: 점진적 인상과 제도의 확장
1990년대에 들어서면서 대한민국의 경제 상황은 고도성장과 함께 구조적 변화가 일어났다. 제조업 중심의 산업구조가 안정되었고, 국민소득이 빠르게 상승했다. 그러나 저임금 노동층과의 격차는 여전히 문제였다. 정부는 최저임금을 단발적 인상으로 해결하기 어렵다는 인식 아래 매년 심의를 거쳐 조금씩 인상하는 방식을 선택했다.
1990년 최저임금은 시간당 626원으로, 1988년 대비 약 35% 상승했지만 이마저도 물가상승과 생활비 상승을 감안하면 충분하지 않았다. 1990년대 초반 최저임금 인상률은 평균 10% 내외였는데 단시 물가를 생각하면 구매력 개선 효과는 제한적이었다. 많은 노동자들이 직업을 병행하거나 장시간 노동을 통해 생계를 유지해야 했다.
특히 이 시기에는 최저임금 적용범위를 확대하는 논의가 본격화되었다. 초기에는 일정 규모 이상의 사업장만 의무적용이었지만, 1990년대 중후반부터는 중소기업, 영세사업장까지 점진적으로 포함시키려는 정책적 움직임이 있었다. 사용자 측에서는 인건비 상승을 이유로 강력하게 반발했지만, 사회적으로는 ‘최저임금은 노동권’이라는 인식이 점차 자리 잡았다. 1990년대 중반 이후의 사회적 논의는 단순한 금액 조정보다 제도의 실효성을 확보하려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1990년대 후반: 외환위기와 최저임금제의 의미 변화
1997년 외환위기는 대한민국 경제를 송두리째 흔들었다. 많은 기업이 구조조정을 단행했고, 대량 해고가 발생했으며 비정규직과 일용직이 급증했다. 이런 상황에서 최저임금제의 필요성은 더욱 절실하게 부각되었다. 정부는 경제위기로 인한 극심한 소득 불평등을 완화하고 사회안정망을 유지하기 위해서라도 최저임금을 유지·강화해야 했다.
1998년 최저임금은 시간당 1,275원으로 책정되었다. 10년 전보다 2.7배가량 상승했지만, 외환위기로 인한 물가급등과 실업문제는 이 상승폭을 무의미하게 만들었다. 많은 저임금 노동자들은 일자리를 잃거나 임금체불을 겪었고, 최저임금 미만 지급이 빈번해졌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이 시기는 ‘최저임금이 법으로 존재해야 하는 이유’를 사회가 재확인한 시기였다.
외환위기 이후 IMF 구제금융 관리 체제 아래에서 정부는 사회안전망 강화를 위해 최저임금제의 중요성을 다시 강조했다. 사회적 대타협 기구에서 노동계와 경영계가 극심하게 충돌했지만, 정부는 일정 수준의 최저임금을 유지하는 대신 고용안정 프로그램을 병행하는 방식으로 위기를 관리했다. 1990년대 후반의 경험은 대한민국이 경제위기 속에서도 최소한의 임금 보장을 포기하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결과적으로 1980~90년대의 최저임금 변동 추이는 단순한 수치의 문제가 아니라 한국 사회가 불평등을 어떻게 다뤄왔는지, 그리고 사회통합을 위해 어떤 선택을 해왔는지를 잘 보여주는 역사적 증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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